1990년대 홍희담의 깃발이 있고 2000년대 하성란의 깃발이 있단 전자의 깃발은 광주민주항생의 주인공이었던 근로자의 옷깃을 가리키며, 후자의 깃발은 익명의 남자가 전신주에 올라가 벗어둔 삼각팬티를 가리킨다. 노동자의 작업복과 개인의 속옷, 둘 사이의 확연한 간극이 이 시대의 깃발이 다른 욕망으로 펄럭이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하성란의 깃발은 정체성을 잃고 소외된 인간 군상들에 주목하고 있다. 그들에게 싸움의 대상은 역사가 아니라 일상이다.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소모품이 되어가는 과정의 한조각 편린에 불과한 일상 말 이다. 그 반복의 현실 속에서 유일한 탈출구는 미필적 우연을 통해 발견한다. 한 남자의 우연한 발견과 타인의 옷가지와 수첩에 적힌 일기를 읽으며 소통을 꿈꾸고, 그 일기 속의 남자는 출근길 옥외광고판 속의 모델과 피피섬으로 떠나는 환상을 꿈꾼다.

이 둘 모두, 이곳 아닌 저곳에서 익명의 타인이 아닌 실명의 당신과 만나고 싶어 한다. 하지만 현실은 시스템의 편이며, 인간관계의 소외를 냉담하게 바라볼 뿐이다. 이곳(현실)에서 저곳(환상)으로 일탈은 허락되지 않고 익명의 타인은 익명의 상태에서 보이던 호의를 실명의 당신이 되는 순간 거두어 간다.

전기공인 ‘나’는 정전 사고의 원인을 찾아 전신주를 점검하던 중에 전신주 아래 가지런히 벗어 놓은 구두 한 켤레를 발견한다. 전신주를 올려다보니 맨 아래 디딤쇠에 양복상의가 걸려있었고 그 위의 디딤쇠에는 바지, 또 그 위에는 와이셔츠가 걸려 있었다. 누군가 전신주를 올라가면서 디딤쇠마다 옷가지를 벗어 걸어둔 것이다. 양복 상의와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거쳐 마지막 꼭대기에는 남자의 삼각팬티가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다. 나는 옷가지들을 걷어 내려온다. 양복 안에는 업무일지로 보이는 작은 수첩이 들어있다. 비에 젖어 내용을 잘 알아볼 수는 없지만, 수첩 안의 일정표는 빼곡히 차 있고 고객들의 이름과 기념일이 정리되어 있다. 수첩의 뒷부분을 펼쳐보니 일기로 보이는 글이 적혀있다. 나는 전신주에 기대어 ‘그’의 일기를 읽어 내려간다.